"숨 쉴 겨를없이 몰아가는 장단 속에서도 자신의 타법 자세가 결코 흐트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격렬하고 빨라질수록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지며 가라앉아 차분해지는 모습이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더욱이 흥미로운 점은 고요한 그의 태도와 몸짓 가운데서도 얼굴은 사뭇 일그러지고,이글이글 잉걸불이 타듯 벌겋게 상기된 모습에서 그 어떠한 사람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섬뜻할 정도의 신기와 광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꽹과리에서 두드려져 나는 소리를 공교로울 정도로 섬세할 뿐만 아니라,격렬하게 두드려져 바셔져 나올수록 차근하게 담어져 간추려진 울음을 내는 것이었다. 김용배의 태도가 고틍스럽게 이지러질수록 꽹과리 소리는 더욱 청명하고 맑은 속삭임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사물놀이의 탄생
김용배(1952-1986)는 1952년 충남 논산 태생이다. 그의 부친은 풍물굿에도 관계했고, 김신이라는 예명을 가진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울로 곧바로 가족이 이주했는데, 집 부근 관음사라는 절에서 머물던 남사당패의 뜬쇠가 찾아오면서 예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거기서 최성구를 비롯한 많은 예인에게 온갖 재주를 터득하게 된다. 이런 김용배가 김덕수를 만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전통예술의 한 갈래로 사물놀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78년의 일이다. 위축되어가는 풍물굿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사물놀이는 전통적인 가락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많은 호응을 받고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들 둘의 음악적 견해차와 강한 개성은 사물놀이 결성 6년만에 이들을 떨어지게 만든다. 김덕수와 결별 후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리더로 갔던 김용배는 점점 외면적 호사와는 다르게 고통스러워졌다. 타고난 유랑기질에 공무원의 신분은 어울리지 않는 격식이었고, 더구나 김용배의 재기와 나머지 사람들의 재기가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인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평소 김용배는 '국립국악원 생활이 양에 차지 않는다. 김덕수네 패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생전에 자주 언급하곤 했다
죽음
1986년 4월23일 새벽 2시경에 남기수(김용배의 제자)를 찾아온 김용배는 "국국악원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다. "나의 예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기수 너 밖에 없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을 자꾸만 요구하지만 우리 민속가락의 복원이 앞서야 한다... 혼이 깃든 민속악을 콩나물대가리로 표현하려면 이론하는 사람들이 먼저 실기를 익혀야 한다... 한가락에서 다음가락으로 넘어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야 하는데 3분만에 혹은 5분만에 사물놀이를 끝내라는 주문은 역겹다." 등의 말을 하며 오전 10시까지 함께 있었다고 한다. 남기수를 떠나기 전 김용배는 국립국악원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신청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날 오후 다시 남기수 등을 만나 '술이 먹고 싶다'면서 무척 화가 나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독한 술을 안주나 잔도 없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 갔다. 이후 일주일간 전혀 연락이 닿지 않음을 궁금해 한 남기수와 여러 행사의 진행위원들이 아파트 경비실 비상열쇠로 김용배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한 악취와 함께 넥타이로 목을 매단 김용배가 심하게 부패한 채 맞은 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無'자만 15개가 주먹만한 크기에서 콩알만한 크기로 점차 작게 쓴 액자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꽹과리가 깨어져 있었다. 이 꽹과리는 신춘국악대전 지방공연 때 늘상 정성스럽게 광약으로 닦아두었던 것이었다. 1986년 5월 1일의 일이다.
김씨가 죽은 날짜로 추정되는 4월 23일 김씨가 생전에 마지막 남긴 풍물가락이 레코드로 출반되었다. 1985년 12말 경기도 벽제에 있는 지구레코드에서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들과 녹음한 것이다.호남우도굿, 웃다리풍물, 영남농악 등 3곡 위입을 끝내고 이들은 힘이 빠져 모두 스튜디오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렸다고 한다.혼신의 힘을 쏟아 제작한 것이다. 벽제화장터 부근에서 마지막 녹음을 하고 레코드가 나온 그날 김씨는 죽었다.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묘한 일이다. 김용배, 그는 푸너리, 길군악7채, 짝드름의 제1인자였다. |